[명량대첩] 명량대첩의 전개와 의의(zert 님 블로그)원문은
여기명량해전은 명량도(鳴梁渡) 해전이라고도 부르며 정유재란(慶長の役) 시기에 일어난 해전 중 하나이다.
일시:1597년 9월 16일 (음력)
장소:조선 전라도 울돌목
결과:조선 수군의 승리
교전세력 :
일본측 지휘관 - 도도 다카토라, 구루시마 미치후사
조선측 지휘관 - 이순신, 김억추
일본측 전력 - 선봉대 중형선 수십척
조선측 전력 - 본대 대형선 십수척, 위장용 함선 백여 척
일본측 피해 - (선봉부대)구루시마 미치후사, 간 마타시로 마사카게(菅又四郎正陰) 등 수십 명 전사
조선측 피해 - 불명(2명 이상 전사)
음력 1597년 9월 16일에 육군과 호응하여 서쪽으로 진격하려던 일본 수군과 그것을 막으려는 조선 수군 사이에서 벌어진 해전. 한국에서는 명량대첩이라 부르며 이순신이 이끄는 조선 수군이 승리를 거머쥔 전투로 이름 높으나, 사실 조선 수군은 지리상의 이점을 이용하여 일본의 선봉부대를 격파한 후로는 전력차를 극복하지 못하고 철수하였다. 이로 인해 전장의 제해권은 일본측으로 옮겨갔기 때문에 조선 수군의 기지였던 전라우수영과 그 맞은편에 있는 진도의 공략을 허용할 수밖에 없었고, 결과적으로 보자면 일본 수군의 침공은 성공했다고 할 수 있겠다. 또한 여기서 전사한 이요국(伊予) 출신 구루시마 미치후사는 조선 정벌 중 전사한 최초이자 마지막 다이묘(영주) 가 되었다. 울돌목은 진도와 우수영반도의 사이에 놓인 해협으로서, 물살이 빠르고 크게 소용돌이치는 곳이 있어 항해하기 매우 어려운 곳이다.
목차
1 전투 경과
2 해전 뒤의 경위
3 평가
4 그 외
4.1 마다시(馬多時)
5 참조
6 참고할 그림
7 외부 링크
전투 경과1597년 8월 하순, 좌군에 소속된 수군 장수 도도 다카토라, 가토 요시아키, 와키자카 야스하루, 구루시마 미치후사는 남원성을 공략한 뒤 함선으로 돌아와 육군과 호응하여 남해안을 따라 서진하고자 하였다. 그 선봉이 9월 6일 어란포에 도착하여 벽파진(진도 동북 해안에 있는 나루터) 에 포진하고 있던 이순신의 조선 수군과 가볍게 겨루었다. 조선 수군은 일단 여기서 일본군의 선봉부대를 격퇴하였으나 대형선이 12, 13척 있을 뿐 전력적으로 열세였기 때문에 일본 수군의 후속부대가 차례차례 집결한다는 것을 알게 되자 우선 울돌목으로 물러났으며, 9월 14일에는 우수영 앞바다로 더욱더 물러났다. 도도 다카토라는 적의 대형선이 근처에 있음을 알고 선박의 포획을 꾀하였다. 9월 16일, 해로가 위험함을 고려하여 전군 중에서 세키부네(중형선) 수십척(조선측 기록에서는 백삼십여 척) 만을 골라 울돌목으로 향했다. 그러나 조선 수군은 이를 알아채고 대형선 12척, 그 외 백여 척의 진용으로 공격을 가하여 구루시마 미치후사 이하 수십명이 전사하고 도도 다카토라가 부상했으며 배 몇 척이 침몰하는 피해를 입었다. 저녁께 조선수군이 당사도로 퇴각함으로써 전투가 종료되었다. 일본 수군은 근방의 해류를 잘 몰랐기 때문에 돛을 펴고 전장을 이탈하는 조선 수군을 추격할 도리가 없었다. 조선측의 기록에 따르면 군선 13척이 이 싸움에 참가했으며("그 외 백여 척" 은 병력을 부풀려 보이려는 의도로 파견한 피난선이라는 사료가 있다) 피해는 없었다고 전한다.
해전 뒤의 경위이 해전을 전후하여 열린 전주회의와 정읍회의에서 육군이 정한 방침에 따라, 서울 부근까지 진출한 육군 중에서 몇몇 다이묘들이 전라도 서남부를 진압하기 위해 9월 중순 무렵을 기하여 남하를 시작하였으며 조선 수군은 일본 육군의 서해안 진출로 인해 북상하여 약 1개월간 대피하고 있어야만 했다. 한편, 조선 수군이 퇴각했음을 안 일본 수군은 명량 해전이 일어난 다음날 즉시 조선 수군의 근거지였던 우수영을 공격하는 동시에 그 건너편에 있는 진도를 공략했다. 더불어 육군과 합세하여 전라도 서남쪽 해안을 제압하였다. 그 뒤에는 월동을 위해 일본 육군이 남해안 방면으로 물러감에 따라 일본 수군도 남해안 방면으로 후퇴하였다.
평가이순신 함대는 일본 수군의 선봉부대를 쳐부수기는 했으나 본대의 압력까지는 버텨낼 수 없었으므로 주력함을 온전히 보존하기 위하여 전라도 북단까지 퇴각함으로써 제해권을 빼았겼으며, 조선 수군은 비주력함과 그 근거지를 잃어버렸다. 조선 수군의 재진출은 일본 육군과 수군이 알아서 물러날 때까지는 불가능했기 때문에 명량 해전은 전략적인 영향이 없다시피 한 국지적인 승리라고 부를 만하다. 한국에서는 이 전투를 "명량 대첩" 이라 부르듯「일본을 크게 이긴 해전」으로 인식하고 있으며 일본 수군의 참가 병력을「군선 133척, 수송선 200척」, 입은 피해를「침몰 31척, 대파 92척, 8000~9000명 전사」라는 등, 과장된 것으로 사료되는 전과를 곧이곧대로 받아들이고 있다. 실제로 좌군에 소속된 수군 병력을 보면 도도 다카토라(2,800), 가토 요시아키(2,400), 와키자카 야스하루(1,200), 구루시마 미치후사(600), 간 헤이에몬 미치나가(200) 합쳐 7,200명이다. 여기에 다른 가문의 수군이 합쳐졌다 해봐야 8,000명을 넘기지는 않을 것이다. 게다가 명량 해전에서는 대형선(아타케부네) 이 아닌 중형선 세키부네만을 발탁하여 공격했다는 점이「고산공실록(高山公実録)」에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미루어보아 한국측이 제기하는 숫자에 무리가 있음은 명백하다고 할 것이다. 또한 이순신이 직접 작성한 난중일기에도 "적선 31척 격파" 라고만 되어 있을 뿐이다.
또한 한국에서는 이 해전이 역사교과서에도 실려 있으며 국민들이 널리 알고 있으나 그 내용상으로는「서진하려 한 일본군에게 대타격을 입히고 진출을 저지했다」라는 부분만 강조되어 있고, 전투 뒤에 이순신이 북방으로 퇴각하여 일본 수군이 서해안으로 진출함으로써 전략목적을 달성했다는 사실은 거의 모르고 있는 실정이다.
그 외마다시(馬多時)「난중일기」에서 격파당해 붙잡혔다고 적힌 일본의 장수 "마다시" 를 가리켜 이 해전에서 전사한 다이묘인 구루시마 미치후사라고 풀이한 것이 태반이나, 일본측 전사자 기록에 적힌 "간노 마타시로 마사카게(菅野又四郎正陰)" 라는 설도 있다. "馬多時"를 한국에서는 Matashi라고 발음하며 "마타시(又四)" 와 발음이 동일하다는 이유에서이다. 덧붙여 "간노(菅野)" 라는 표기는 잘못된 것이며 올바른 표기는 좌군 수군으로 참가한 다이묘였던 아와지 수군(淡路水軍) "간 헤이에몬 미치나가(菅平右衛門達長)" 의 아들인 "간 마타시로 마사카게(菅又四郎正陰)" 이다.
5, 6, 7은 패스.
덤.
좀 예전부터 이 항목을 보고 있었는데 참 자주 바뀌는군요. 특히 "마다시의 몸을 토막내어 걸어두니 일본군의 사기가 크게 하락하였다(출처 필요)" 부분에서 크게 웃었던 기억이 나는데 지금은 사라졌네요.
일단 난중일기에 마다시를 잡아서 토막낸 건 기록되어 있으니 그 부분의 출처를 요구하는 건 아닐 테고, 일본군의 사기가 꺾였다는 증거를 대라 이건데…참 쪼잔하기 짝이 없지요 네[…]